걱정에 걱정에 걱정을 더해서(날아.. 가지 마....)
36번째 레터에서 썼던 한국의 그레타 툰베리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그에 연장선으로 지난 월요일에 청구된 “아기기후소송”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청기행은 현재 청소년 기후헌법소원을 진행 중입니다. 2020년 3월 13일 청구된 헌법소원은 아시아 최초의 청소년 기후소송으로 본 심의를 통과해 현재까지 왔습니다. 이후 한국에서도 다양한 기후소송이 진행되었고 모두 기후위기 당사자인 사람들의 주체적인 소송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지난 13일, 5세 이하 아기가 주된 청구인이 된 ‘아기 기후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탄소중립기본법 시행령 내 명시한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40%는 위헌이라는 요지입니다. 이 소송에는 20주 차 태아가 대표 청구인으로 한 62명의 아기, 어린이들이 청구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아기 기후소송은 이전 소송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존재합니다. 이름은 아기기후소송이지만 청구대리인들의 소송이기 때문이죠. 이 소송의 주체는 부모입니다. 청구인인 아기들의 대리인들이 소송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의 이름으로 청구한 것이 아기기후소송입니다.
청구 기자회견에서는 다양한 단위가 참여해 연대발언했고, 청기행에도 연대 발언 요청이 왔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기후소송을 진행했던 단위인지라 연대에 대해서는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연대하기에 어려운 지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청기행은 청소년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참여를 기본으로 합니다. 청소년을 수단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기후위기가 미래 세대의 일이라고 취급되지 않도록 메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처음 이 아기기후소송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주체가 누구일까. 누구를 위해 하는 소송일까. 한 인터뷰 기사가 나오고 나서야 우려했던 부분이 현실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진행하는 기후소송. 청기행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응원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개인의 주체성을 훼손하고 기후위기를 단지 미래 세대의 일로 취급하는 듯한 메시지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글도 이 때문에 쓰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기후위기를 미래 세대의 일로만 취급하는 것, 청소년을 수단으로만 보는 것 등 문제의식조차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청구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보도 자료가 배포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당사자의 이름을 건 소송이 아닌 대리인의 소송이라는 건 현재의 위기를 흐리게 하고 단지 미래의 일로 축소하기 때문이었죠. 이는 현재 기후운동을 하는 모든 당사자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미래 세대가 기후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하는 건 지금도 위기를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워버립니다. 당사자를 피해 여부로만 판단하고 그들의 위기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미래에 더 고통스러울 거다.”라고 일축하는 메시지에 우리가 어떻게 동의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 소송이 아기기후소송이라고 이름이 붙은 만큼 청구인은 5세 이하의 아기들과 어린이들이 청구인입니다. 대표 청구인은 20주 차의 태아에 대하여 낙태죄 판결문을 인용하여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우려되는 지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기후소송이 아직 어떠한 선례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나쁜 선례로 남지 않게 조심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마냥 좋아 보인다고 함께할 정도로 가볍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지금의 변화를 만드는 것도 맞지만 앞으로의 행동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기후운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문제를 지워버리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게 어떻게 기후위기 해결일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기다리면 늦으니까 지금 행동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게 아이들의 이름으로 청구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왜 자꾸 기후행동 앞에서 다른 존재의 뒤에 숨기만 하는 걸까요. 단지 기후위기를 위해 뭐라도 해보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의미 없을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뭐라도 해야 하니까, 의미 있는 일이니까. 어쩌면 전부 아닐 수 있다는 고려가 가장 먼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